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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어떤 아름다운 ‘취미’

“당신은 왜 제 그림을 238점이나 사는 겁니까?” 화가가 물었다. 남자가 답했다. “당신은 산다, 판다고 말하지만 당신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일본인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 작품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맡겨두는 것일 뿐입니다.” 귀 기울여 듣던 화가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좋습니다.”   1997년 10월 16일,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당시 나이 80세이던 미국 국민화가 앤드루 와이어스(1917~2009)는 그렇게 자신의 작품 238점을 스사키 카쓰시게(須崎勝茂·73) 마루누마 예술의 숲 대표에게 건넸다.   고흐도 모네도 로댕도 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 5000여 점을 보유하고 있지만, 미술관은 없다. 대지진 피해지처럼 ‘위로’가 필요한 곳에서 모든 비용을 대고 전시를 하거나, 고향인 아사카(朝霞)시 박물관 등에 무상으로 제공할 뿐이다. 작지만 다부진 체구, 짧은 백발의 그를 지난 5일 도쿄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마루누마 예술의 숲 한·일 교류전’에서 만났다.   25살 나이, 큰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으면서 뛰어든 창고 임대사업. 회사는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일에만 빠져있던 그에게 어느 날 조부가 한 마디 던졌다. “돈이 얼마가 있든 취미가 없는 인생은 쓸쓸하다.” 서른살, 그가 도전한 취미는 도예였다. 동경예술대 학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뜻하지 않게 예술가를 꿈꾸는 학생들의 척박한 환경에 귀 기울이게 됐다. ‘학교를 졸업해도 작업실도, 돈도 없으니 꿈을 이루기 어렵다’는 거였다.   스사키는 그 길로 집 근처 대밭을 갈아엎었다. 그리고 1985년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작업실을 세웠다. 마루누마 예술의 숲 레지던스의 시작이었다. 무명의 젊은 작가들을 이곳에 불러와 작업공간 제공은 물론, 재료비 지원, 전시회 지원을 하기를 올해로 40년. ‘아시아의 앤디 워홀’로 불리는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타카시도 20년간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인구 14만여 명의 작은 도시 아사카시의 마루누마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선 꼭 한 번 가고 싶은 곳이 됐다. 8년 전부턴 한해 3명씩 한국 젊은 예술가를 초대하면서 한국 작가들의 발길마저 이어지고 있다. 전시회에서 만난 스사키 대표는 “취미로 인해 세상이 넓어졌고, 이젠 예술가를 키워내는 것이 내 취미가 됐다”며 활짝 웃었다. 평소 유니클로를 입고 다니면서도 반평생 낯선 예술가들을 선뜻 후원해온 아름다운 ‘취미’를 가진이를, 우리 사회에서도 볼 날이 오길 바라본다. 김현예 / 도쿄 특파원글로벌 아이 취미 동경예술대 학생 스사키 대표 재료비 지원

2024-04-14

[글로벌 아이] 시에스타 논쟁 뜨거운 스페인

“식당들이 새벽 1시까지 영업하는 나라는 합리적이지 않다. 영업시간을 계속 늘리는 일은 미친 짓이다.”   최근 스페인을 발칵 뒤집어 놓은 욜란다 디아즈 부총리 겸 노동·사회경제부 장관의 말이다. 밤 10시에도 저녁 식사가 한창인 생활습관을 고수하는 나라에서 좌파 장관이 의회에서 던진 발언은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우파 정치인들은 즉각 “디아즈 장관은 우리 모두 일찍 집으로 돌아가 등불 아래서 차를 마시며 공산당 선언을 읽기 바라는 것이다”라고 받아쳤다. 업계도 반발했다. 식당 영업시간을 1시간 줄이자는 제안이 엉뚱하게도 이념 논쟁으로 번진 상황이다.   스페인은 유럽 국가 중 일과가 가장 늦게까지 이어지는 나라다. 그 이유는 태양이 절정인 오후 2시에서 일을 멈추고 열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5시에 재개하는 ‘시에스타(siesta)’ 관습 때문이다. 이 시간, 식당과 상점은 문을 닫고 길거리는 한산해진다. 농경 사회일 때 시에스타는 고단한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낮잠을 자면서 재충전하는 시간이었다.     2016년 한 조사에 따르면 아직도 이 생활 습관을 그대로 지키는 스페인 사람은 약 18%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낮의 브레이크 타임(break time)은 스페인에서는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시에스타 이후 오후 8시까지 이어지는 영업, 이에 따라 늦어지는 저녁 식사, 식사 후 술 한 두 잔 마시며 즐기는 ‘소브레메사’(sobremesa: 식후 식탁에 남아 대화를 즐기는 시간)까지. 식당들이 문을 일찍 닫을 수 없는 조건들이다. 이미 껑충 뛰어버린 종업원 인건비, 이들의 늦은 퇴근 및 귀가로 발생하는 심야 교통비, 그리고 야근으로 생기는 각종 육체적·정신적 건강 문제를 생각한다면 식당 영업시간을 줄이자는 디아즈 장관의 주장은 일리가 없지 않아 보인다.   스페인 노동계는 노동시간을 현행 40시간에서 37.5시간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장시간 일할수록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를 내세우면서 지난 수년간 스페인만의 특수한 노동 시간에 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시에스타가 이런 노동시간 축소 논의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인식과 생활습관은 무섭다. 하루아침에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종의 문화가 되어버린 생활 관습을 대상으로 하는 논쟁은 예민한 측면이 있다. 스페인의 생산성 제고와 노동시간 단축 과제가 그들의 전통과 맞서며 어떤 변화를 이루어낼지 흥미롭다. 안착히 / 한국 중앙일보 글로벌협력팀장글로벌 아이 시에스타 스페인 식당 영업시간 최근 스페인 스페인 사람

2024-04-03

[글로벌 아이] 블링컨의 식탁·메뉴론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20일 서울에서 폐막했다. 배제된 중국은 관영 통신사를 통해 개최국 한국을 미국의 ‘졸(馬前卒)’에 비유했다. 한 신문은 사설에서 관뚜껑이 덮였다며 ‘개관논정(蓋棺論定)’에 이번 회의를 비유했다. 중국은 왜 이렇게 흥분했을까. 배경에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식탁·메뉴 발언이 자리한다.   “국제 시스템 안에서는 테이블에 없다면, 메뉴에 오르게 될 것이다.” 지난달 17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한 말이다. 독일·인도 외교장관과 함께한 세션에서 사회자는 “미·중의 긴장이 더 큰 분열로 이어지고 있고, 미·중이 동맹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며 미국의 입장을 물었다. 미국 외교 사령탑은 이때 작심하고 식탁·메뉴론을 꺼냈다.   중국·북한·대만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중 경쟁이 새롭게 격투기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분석했다.   우선 중국. 관영 신화사가 영문 칼럼에서 블링컨을 소설·영화 속 식인범 ‘한니발 렉터’에 비유했다. “워싱턴이 무자비한 제로섬을 추구한다”고 했다. 환구시보가 이어 “중국어로 번역하면 ‘칼자루를 잡지 못하면 고기가 된다’는 뜻”이라며 “약육강식의 세계관에 오싹한 냉혹함과 한기가 배어 있다”는 비난 사설을 실었다. 북한의 반응은 좀 늦었다. 이달 1일 노동신문에 “미국이 더 이상 ‘식도락’을 누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맹비난 논평을 실었다.   대만 신문은 “미국의 전략과 지정학적 사고가 바뀌고, 미국 국력이 쇠퇴하면서 나온 발언”이라며 “트럼프 같은 고립주의 성향의 대통령 당선이 유력하다는 자체가 자유주의 가치외교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우려했다. 또 “식탁 아니면 메뉴는 적나라한 비유이지만 현실적”이라며 집권당에 경종을 울렸다.   최근 미국 의회는 틱톡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중국은 유튜브·페이스북 등을 금지하면서도 “조폭의 논리”라며 반발했다.   중국의 격한 반응에 조바심이 묻어난다. 중국은 지금도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와 휴전협상을 병행했던 마오쩌둥의 양수론(兩手論)에 충실하게 미국을 상대한다. 블링컨의 발언은 쇠퇴하는 미국이 더는 호락호락하게 페어플레이만 하지 않겠다는 경고다.   내년 백악관의 주인은 미·중 경쟁을 더욱 과격하게 몰고 갈 것이다. 바이든의 신(新)합종정책이 시즌 2를 맞을지, 트럼프의 신고립주의 폭풍이 몰아칠지는 알 수 없다. 두 시나리오별로 대응반이 가동돼야 한다. 여야 정치권은 총선 후부터라도 외치에 힘을 모으기 바란다. 나라를 메뉴판의 고기로 만들지 않으려면 말이다. 신경진 한국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글로벌 아이 메뉴론 식탁 메뉴 발언 신고립주의 폭풍 자유주의 가치외교

2024-03-22

[글로벌 아이] '왕'의 마지막 회견

중국에 있는 전 세계 언론사의 특파원들이 7일 이른 아침부터 베이징 미디어센터에 몰렸다. 입구부터 경계가 삼엄했다. 이름, 사진, 소속이 적힌 기자증을 일일이 확인하고서야 차량이 지날 수 있게 정문을 열어줬다. 건물로 들어설 땐 국제공항 출국장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엑스레이 검사대와 금속탐지기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색받았다. 이 과정을 통과해야 2층 회의실로 오를 수 있었다. 이날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기자회견이 열리는 곳이다.   기자회견은 오전 10시로 공지됐지만 자리 다툼이 치열했다. 약 3시간 전부터 취재진이 몰려 300석 넘게 마련한 좌석엔 빈 곳이 없었다. 100대에 가까운 방송 카메라가 연단을 비추고 있었다. 10시 정각이 되자 왕 부장(사진)이 등장했다. 수백 명의 눈동자가 한 곳을 향했다. 준비한 인사말을 마친 왕 부장은 1시간 30분 넘게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내외신 기자 21명에게 질문받고 일일이 답했다. 특히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길은 북한의 합리적인 안보 우려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회견 종료 후에도 일부 기자들이 연단으로 달려가 질문을 쏟아냈다. 한 일본 기자는 “우리에겐 질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음 질문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번이 외교부장으로서의 마지막 기자회견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953년생으로 올해 만 70세인 왕 부장은 앞서 10년 동안 외교부장 자리를 맡은 뒤 부총리급인 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으로 영전했다. 하지만 후임인 친강 전 외교부장이 면직되면서 지난해 7월부터 외교부장을 겸임하고 있다.   한 직급 아래인 외교부장을 겸한 건 임시방편이라는 분석이다. 후임 외교부장으로는 류젠차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거론된다. 류 부장은 외교부 대변인 출신으로 주필리핀대사와 주인도네시아대사 등을 지냈다. ‘사드 배치’ 관련 논의가 본격화되던 2015년 3월엔 서울을 방문해 외교 협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앞서 왕 부장은 올해 신년 축사에서 한국 이야기를 쏙 빼놨다. 중국 외교정책 방향을 설명하면서 미국, 러시아, 일본 등을 차례로 언급했지만 한국은 거론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최근 소원해진 한.중 관계의 현주소다. 앞으로 중국 외교가 나아갈 변화의 방향에 관심이 쏠린다. 이도성 / 한국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글로벌 아이 회견 후임 외교부장 동안 외교부장 마지막 기자회견일

2024-03-08

[글로벌 아이] 덩그러니 놓인 미국의 투표함

사실상 미국 대선 후보를 결정할 5일 ‘수퍼 화요일’을 앞둔 지난달 말. 경선이 예정된 버지니아의 공공 도서관에서 낯선 기계를 발견했다. 1주일 뒤 선거 때 사용할 전자 투표함이었다.   투표함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방에 놓여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영어와 병기된 한글 ‘투표’라는 글씨였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니 그런가 했다. 그러고나서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이게 여기에 이렇게 있어도 되는가?”   관계자에게 물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원래 이렇게 해왔다”고 말했다. 폭력 사태로 번진 대선 불복 얘기를 꺼냈더니, “사람들이 지켜보는 이곳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당신 말고 아무도 투표함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지난 1월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때의 일이다. 허락을 구해 투표소 내부를 취재했지만, 투표함 접근은 거절됐다. 개표 결과 역시 참관인 발표 전까지는 촬영할 수 없었다. 선거 부정의 여지 때문이라고 했다. 유권자도 투표소를 확인하려면 시민권을 입증하는 정보를 입력해야 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투표소 위치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다. 투표소에는 투표함이 덩그러니 놓여있는데도 말이다.   서퍽대학교의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지지자의 52%는 올해 대선에서 선거 부정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공정할 거란 의견은 7%였다.   반대로 바이든 지지자들은 81%가 공정성을 신뢰했고, 불신한다는 응답은 3%에 그쳤다. 특히 지지 정당을 떠나 전체의 83%는 ‘민주주의가 걱정된다’고 답했다. 여기에 트럼프는 경선 직전인 지난 3일 버지니아 유세에서도 “조작하기에 너무 큰 투표율을 확보해야 한다”며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 자체에 대한 불신을 계속 부추겼다.   총선을 앞둔 한국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 이미 ‘소쿠리 투표’라는 막장을 보여준 선관위는 이번엔 수검표 과정을 추가했다. 정당 난립으로 비례대표 투표용지 길이도 21대 때의 48㎝를 넘어설 것으로 보여 이 역시 수개표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사전투표 용지 날인에 대해선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   미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링컨 대통령은 “투표(ballot)는 총알(bullet)보다 강하다”고 했다. 그러나 신뢰하지 못하는 제도를 통해 이뤄진 투표와 그로 인해 창출된 권력은 강한 힘을 낼 수 없다. 특히 0.73%포인트로 당락이 결정되는 한국에서는 보다 더 정교하고 공정한 ‘게임의 룰’이 필요하다. 강태화 / 한국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글로벌 아이 미국 투표 유권자도 투표소 투표소 위치 비례대표 투표용지

2024-03-04

[글로벌 아이] 11월로 질주하는 ‘설국열차’

온도계가 영하 30도를 찍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온몸을 찔렀다. 체감온도가 영하 40도에 육박하면서 예정됐던 집회는 줄줄이 취소됐다.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미국 아이오와에서 ‘대선열차’는 이렇게 출발했다. 11년 전 나온 영화 ‘설국열차’처럼 말이다.   설국열차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요약하면 “애초부터 자리는 정해져 있다”는 윌포드의 앞잡이 메이슨의 말에 목숨을 걸어 투쟁하고,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대사로 끝을 낸다. 그런데 2024년 미국 정치판에선 이렇게 뻔하디뻔한 서사 구조가 사라졌다.   현재까지 유력한 11월 대선 시나리오는 전·현직 대통령의 맞대결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는다. 특히 상대방이 당선되면 “민주주의가 파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 중 한 명을 골라야 할 미국인의 입장에선 결과와 무관하게 민주주의의 종말이 예고된 선거란 의미가 된다.   미국 정계에서 ‘정치 박사(Dr. Politics)’로 불리는 스테판 슈미트 아이오와 주립대 교수에게 이 말을 꺼내자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 “참 슬픈 현실”이라며 “인간의 공격성을 억제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혐오를 조장하며 이를 무기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익숙한 말을 이어갔다. 공화당은 입법부를 통제할 순 없지만, 의회를 멈춰 세울만한 의석이 있기 때문에 민주당이 타협과 협상을 하지 않으면 정부 기능이 마비될 거란 설명이었다. 또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정치가 의회를 떠나 법원과 길거리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의 말은 주어를 한국의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으로 바꿔도 신기할 정도로 상황이 맞아떨어진다.   미국인들의 인식 역시 비슷하다.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4분의 3이 트럼프와 바이든의 재대결을 원치 않는다고 답했다. 또 다른 조사에선 바이든 지지자의 절반 이상이 바이든이 좋아서가 아니라 트럼프를 낙선시키기 위해 투표한다고 했다.   최선(最善)도 차선(次善)도 아닌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대선이란 뜻이다. 슈미트 교수는 “정말 미국과 전 세계에 가장 피해가 작을 것 같은 후보를 선택하는 선거가 될 수도 있다”며 “이제 미국의 대선은 더는 멋지지도 훌륭하지도 않다. 이게 솔직한 현실”이라고 했다.   영화 설국열차는 열차에 탄 승객들이 현실을 깨닫고 스스로 열차를 멈춰 세운 뒤에야 끝이 난다. 정치라는 열차 역시 유권자가 멈춰 세우기 전까지는 온갖 모순을 가득 실은 채 계속 질주할 뿐이다. 강태화 / 한국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글로벌 아이 설국열차 질주 영화 설국열차 정치가 의회 슈미트 교수

2024-01-17

[글로벌 아이] ‘퍼펙트 데이즈’를 꿈꾸며

이른 새벽, 근처 공원 빗자루 소리에 잠에서 깬다. 침대도 TV도 없는 좁은 다다미방, 이불을 개고 화분에 물을 주고 ‘도쿄 토일렛(Tokyo Toilet)’이란 문구가 새겨진 작업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도쿄(東京) 시부야구에 있는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이 그의 일. 청소가 끝나면 대중목욕탕에 들러 몸을 씻고 아사쿠사역 지하 선술집에서 하이볼 한잔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헌책방에서 산 문고본을 읽으며 잠을 청하는 생활, 지난 연말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의 주인공 히라야마(平山)의 하루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야쿠쇼 코지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긴 이 영화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만든 독일 감독 빔 벤더스가 연출했다. 제작의 계기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등 일본 유명 건축가들이 시부야 구내 17개 공공 화장실을 설계해 개조하는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였다. 주최 측은 이 사업을 알리려 영화를 기획했고 도쿄를 찾은 벤더스 감독은 이 화장실들의 예술성과 독창성에 감탄해 연출을 수락했다. 그렇게 일본과 독일의 거장들이 참여한 ‘화장실 홍보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에는 대사가 아주 적다. 주인공이 화장실을 청소하고 밥을 먹고 운전을 하고 책을 읽는 모습이 잔잔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사이사이 여러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다. 출근길 차 안 카세트 테이프에서 패티 스미스, 루 리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이 흘러나올 때, 휴식 시간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하늘과 나무를 찰칵 찍는 찰나, 누군지 모르는 화장실 이용자가 숨겨 놓은 쪽지에 암호를 적으며 소통하는 순간 등이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도 주인공은 자주 미소를 짓고 그렇게 매일 같으면서도 다른, 정갈한 ‘퍼펙트 데이’를 살아간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극장엔 혼자 온 관객이 많았다. 연말연시 긴 연휴를 맞아 다들 고향으로 떠나 텅 비어버린 도쿄에 이런저런 이유로 남은 이들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변기 아랫부분까지 거울로 비춰가며 열정적으로 청소하는 히라야마에게 젊은 동료 다카시는 말한다. “히라야마씨, 너무 과한 것 아닌가요. (변기는) 어차피 또 더러워질 텐데 말이에요.”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고 실패할 줄 알면서도 도전하고, 상처 받을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날들이 또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퍼펙트한 순간들을 조금씩 늘려가며 정성스럽게 일상을 꾸려가야겠다는 다짐. 연말의 탁월한 영화 선택이었다. 이영희 / 한국 중앙일보 도쿄특파원글로벌 아이 퍼펙트 데이즈 퍼펙트 데이즈 주인공 히라야마 화장실 이용자

2024-01-03

[글로벌 아이] 한국을 보는 중국 “국면 조성 기대”

빙판길, 차는 조심스레 멈춰섰다. 휘날리는 눈발 속 천안문이 보였다. 광장 맞은편 거대한 중국 국가박물관이 위압적으로 기자들을 맞았다. 이젠 익숙해졌지만 공항 못지않은 몸수색 뒤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지난 14일 중국 국무원이 내외신 기자, 각 부처 대변인, 국제기구 대표, 싱크탱크 전문가를 불러 신년 인사회를 열었다. 코로나 이후 4년 만이었다. 500여 명가량 참석했는데 서방 기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CNN에서 1명 참석했고 불편한 보도를 자주 냈던 BBC 기자는 불참했다. 일본 기자도 많이 보였다.   스탠딩 형식으로 음료를 손에 들고 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자리, 적극적으로 찾아가 얘기를 들어봐야 했다. 먼저 요소수 이슈가 터진 국가발전개혁위 대변인을 찾았다. 발전개혁위는 우리나라로 치면 기재부 격으로 중국 경제를 총괄하는 부서다. 한국의 중앙일보 기자라고 인사하자 호의적으로 맞았다.   그는 최근 한·중 관계에 대해 묻자 “중·한은 뗄 수 없는 이웃”이라며 “양국이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라고 말했다. 양국 간 경제 협력이 중요한 시점이란 설명이었다. 중국 요소수 수출 통제가 당국 방침인지에 대해선 “국내 수요에 따라 대응하는 것일 뿐 특정 국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국내 상황이 변수라면 한국을 고려해 수출을 푸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이번 기회에 수입선 다변화 등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중국 외교부 왕원빈 대변인은 마이크 앞에서의 단호함과 달리 온화한 성품이란 인상이었다. 한·중·일 정상회의 전망에 대해 그는 “왕이 외교부장이 밝힌 입장에 답이 다 들어있다”면서도 “조만간 국면이 조성돼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중국 외교부 관계자는 기자와 만나 미 샌프란시스코 APEC 회담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조율되지 않은 것과 관련해 “사전에 분위기 조성이 좀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전한 바 있는데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한·중관계는 예전 같지 않다. 사드, 홍콩 사태, 코로나를 거쳐 올림픽 판정 시비, 역사·문화 논란에 이르기까지 감정을 악화시키는 문제가 켜켜이 쌓여왔다. 반일감정보다 반중감정이 더 높은 게 현실이다. 하지만 중국이 인접 국가인 것도,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 관계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 당국자들을 만나면서 외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소통이 갈등의 해법이란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양국간 분위기 전환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됐다. 실리적 차원에서 한·중 관계의 해빙 국면을 끌어낼 카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성훈 / 한국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글로벌 아이 중국 한국 국가발전개혁위 대변인 외교부 왕원빈 요소수 수출

2023-12-20

[글로벌 아이] 중국은 정보 공백 지대? 이해의 적자 <赤字>

지난해 9월 말 중국공산당의 최대 정치 이벤트인 20차 당 대회를 보름여 앞두고 FT는 중국 관련 ‘정보의 진공’을 우려했다. 중국이 외국 전문가의 중국 연구를 막으면서 베이징을 이해할 수 없게 됐다는 지적이다. 비용은 크다. 외국의 정책 결정자 사이에서 중국과 교류를 주장하는 관여(Engagement)는 이미 더러운 용어로 전락했다. 반면 세계 도처에 퍼진 중국의 정보원들은 시시콜콜한 소식을 모두 중국에 타전한다. 이해의 적자(赤字) 현상이다.   최근에는 유학의 적자로 번졌다. 베이징대·칭화대 등 중국 명문대에서 석·박사 학위 과정을 밟는 많은 한국 유학생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중국 전문가의 꿈에 부풀어 선택한 중국 유학이 점점 두터워지는 만리장성급 벽에 부딪혀서다. 중국 당국은 지난해부터 학위 논문 심사를 기존의 예심·본심 2단계에 교육부 심사를 추가했다. 다섯 명으로 구성된 교육부 심사관 중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학위는 물 건너간다. 해당 학과 전체가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지도교수조차 심사관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결국 교수들은 당국이 꺼리는 주제를 피하라고 권한다. 현지조사나 설문, 인터뷰 등 연구 방법이 불가능해졌다. 신방첩법(반간첩법 개정안) 시행 이후 국가안전부가 나서자 중국인끼리도 말을 조심하는 요즘이다. 외국인 중국 전문가는 싹부터 사라질 처지다.   역으로 중국 유학생은 해외 도처로 나가 첨단 학문과 민감한 이슈를 연구한다. 박사로 돌아와 중국을 위해 봉사한다. 이해의 적자, 유학의적자가 누적되는 구조다.   외국계 컨설팅 회사의 철수는 빙산의 일각이다. 중국에 쓴소리를 하면 비자를 막는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다룬 ‘천안문 페이퍼스’를 펴낸 앤드류 네이선(80) 컬럼비아대 교수는 비자 발급이 막혀 중국을 갈 수 없는 중국 전문가가 됐다. 한국에도 비자 장벽에 중국을 갈 수 없는 중국 전문가가 있다는 후문이다.   외국 특파원의 취재도 녹록지 않다. 얼마 전 영국 국적의 화교 외신 특파원을 만났다. 중국인 전문가 코멘트 등 취재의 ABC조차 힘들어지는 처지를 함께 개탄했다.   중국공산당은 지난해 당 대회 정치보고에서 “평화적자, 발전적자, 안보적자, 거버넌스 적자가 늘면서 인류 사회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정작 이해의 적자는 무시했다. 만리장성에 막힌 실크로드가 매력을 잃고 있다. 신경진 / 한국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글로벌 아이 중국 정보 교육부 심사관 외국인 전문가 외국 전문가

2023-11-10

[글로벌 아이] 한중관계의 온도

베이징 교민사회의 요즘 화젯거리 중 하나가 이번달 10~12일 열리는 K-FESTA(페스타) 문제다. 매년 이맘때 한국 중소기업들과 요식업체들이 베이징 한인타운인 왕징 시내에서 2~3일간 여는 행사인데 이번에 장소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왕징 한복판에 위치한 쇼핑타운 1층에 자리잡고 행사를 해왔다. 우리 제품을 알리고 한국 식품도 판매하는 연례 행사인데, 올해 당국이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행사를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장소는 왕징을 벗어난 곳에 어렵게 잡았다고 한다.   작은 일 같지만 이런 일들이 중국에선 중요한 관심사다. 그도 그럴 것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일상적으로 처리되던 일을 갑자기 못하게 되는 경우가 중국에선 허다하다. 이번에도 행사장 불허에 교민들의 우려와 불만이 터져나왔다. 여러 경로로 확인해본 결과, 3월부터 베이징에서 실외 행사 허가 과정이 강화된 데다 예년 행사 장소에 화재가 난 일이 있어 안전 우려 때문에 허가할 수 없다는 게 당국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 무슨 꿍꿍이인가’사람들은 중국의 속내에 불안해한다.   반면 중국의 다른 지역에선 한국 기업들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여러 우리 기업 임직원들의 말을 종합하면 중국 지방 성급에선 예우가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 기업마다 담당자를 한 명씩 지정해 개별 관리를 하거나 당국이 먼저 접근해 사업 유치를 제안해 온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중국 경제 침체로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미·일 협력 관계가 강화되는 가운데 중국 관료들이 낮은 자세를 보인다는 건 좋은 신호다.   지난 11일 중국은 국영언론 CGTN의 앵커였던 호주 국적의 청레이(成?)를 석방했다. 3년 가까이 가택연금 중이던 그녀를 석방시키기 위해 호주는 지속적인 노력을 했다. 이날 석방은 얼어붙었던 양국 관계 해빙의 신호탄으로 해석됐다.   한중관계는 최근 교착 상태다. 사드 사태 때와 같은 보복 조치는 없지만 중국은 북핵 사태에 대한 접근, 탈북민 북송 등 민감한 이슈에 정중동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대미·대일 외교를 강화하면서도 아시안게임 총리 참석 등 중국과의 적절한 거리 유지를 위해 공을 들인다. 사드 사태 이후 7년, 한중 관계는 새로운 관계 설정의 갈림길로 접어들었다. 중국의 위기가 우리에겐 기회다. 북한 문제와 중국 시장 개방에 중국의 성의 있는 조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올해 말 한·중·일 정상회의가 개최된다면 관계 정상화의 또 다른 변곡점이 될 수 있다. 박성훈 / 한국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글로벌 아이 한중관계 온도 행사장 불허 베이징 교민사회 실외 행사

2023-11-01

[글로벌 아이] 반복된 서사, 중국인도 지쳤다

1950년 9월 30일 중국 국경절 리셉션. 마오쩌둥 주석은 산부인과 의사 린차오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적기가 병원에 폭탄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할 건가?” 의사는 말했다. “내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보호할 겁니다.”   지난달 28일 중국에서 또 한편의 항미원조(抗美援朝) 영화가 개봉했다. ‘의용군:영웅의 출격’. 6·25 종전 70주년을 맞아 ‘패왕별희’로 유명한 천카이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는 더 집요하게 중국의 참전을 정당화하고 왜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싸워야 했는지 강변한다. 유엔 회의에서 중국 대표는 38선을 넘은 미군을 침략자라 비난하고 마오 주석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영화는 그해 11월 30일 중국 의용군이 전사한 평안남도 ‘송골봉 전투’로 치닫는다. 치열한 교전 끝 마지막 남은 소나무 한 그루를 비추며 이들의 희생과 미군의 잔혹함을 대비시킨다. 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그 시대를 인식하게 하고 젊은이들이 역사적 맥락에서 의용군들의 공헌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개봉 전부터 ‘서사적 걸작’, ‘시공간을 넘어선 교감’이라며 분위기를 띄웠다. 하지만 결과는 딴판이었다. 2년 전 같은 시기에 개봉한 ‘장진호’가 12시간 만에 2억 위안(370억원)을 돌파한 데 반해 ‘의용군’은 개봉 첫날 2700만 위안(50억원)의 수익을 올리는 데 그쳤다. 개봉 일주일째였던 지난 5일 ‘의용군’의 누적 수익은 4억3600만 위안으로 같은 기간 ‘장진호’ 30억 위안의 15% 수준에 불과했다. 연휴 기간 흥행 순위는 경찰 영화 ‘바위처럼 단단해’(7억8000만 위안)와 로맨틱 코미디 ‘엑스:젊은 결혼’(6억 위안)에 밀렸다.   장쯔이, 탕궈창 등 중국 최고 배우들의 등장에도 흥행에 실패한 건 반복되는 서사에 중국인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란 평가다. 한 매체 기사의 댓글에선 “사람이 만든 영화인가?”라는 짧은 문구가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 중국 영화평론가들도 “기대가 컸지만 관객들은 캐릭터들이 구호를 외치는 것 같은 느낌만 받았다”, “정치적 성과를 축적하려는 시도로는 흥행할 수 없다”며 배우만 바꾼 선전 영화를 혹평했다.   격세지감이다. ‘장진호’에 흥분했던 중국인들의 분위기는 2년 만에 크게 달라졌다. 외교적, 경제적으로 미국과 충돌을 피하려는 당국의 기류도 있다. 시진핑 주석은 다음 달 미국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할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비극적인 전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중국의 모습은 이제 그만 봤으면 싶다. 박성훈 / 한국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글로벌 아이 중국 서사 서사 인도 서사적 걸작 선전 영화

2023-10-06

[글로벌 아이] 독일 통일 33년

3일은 단기 4356년 개천절. 한국처럼 이날을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는 나라가 또 있다. 다름 아닌 독일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됐던 동독과 서독이 다시 한 나라로 새출발 한 날이 1990년 10월 3일이다. 그날 0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위 하늘로 축하 폭죽이 수를 놓은 가운데 흑·적·금 삼색의 통일 독일 국기가 게양됐다. 수많은 독일인들은 분단 시절 서로가 겪었던 억압, 폭거와 그에 따른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통일 독일 33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통합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 몇 년 새 테슬라와 인텔 등 다국적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낙후된 구 동독지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지만, 서독과의 격차는 여전하다. 독일 중앙은행 통계에 의하면 서독 가구의 평균 순자산이 거의 13만 유로(1억8600만원)인 데 비해 동독 가구의 평균 순자산은 서독의 3분의 1 수준인 4만 유로(5700만원)를 조금 넘을 뿐이다. 이런 고질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 상속세를 비롯한 조세 개혁책 등이 논의되고 있지만, 격렬한 정치적 대립과 만만찮은 부자들의 반발로 갈 길이 멀다.   또 다른 문제는 수십 년간 지속된 젊은 세대들의 동독 기피 현상이다. 사실상 한 세대가 실종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동독지역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서독을 좇아 고향을 떠났다. 그래도 통일 직후 계속된 정부의 노력 덕분에 동독의 임금 수준은 이제 서독의 90%에 육박한다. 이 덕분인지 반갑게도 일부 젊은 세대의 동독 회귀가 관찰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또 다른 과제를 마주하고 있는데, 바로 사상 최저인 15~24세 인구비율이다. 베이비붐 세대 덕분에 1983년 16.7%의 정점을 찍었던 15~24세 인구비율은 현재 10% 수준에 불과하다. 노동력이 무엇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국가의 역할과 의무를 바라보는 동서독 국민 사이의 시각 차이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기적 같이 이루어낸 통일로 동독의 생활 수준은 향상되었고, 동독인들이 갈망하던 자유도 이젠 당연한 권리가 되었다.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 남과 북으로 나뉜다는 상상조차 할 필요 없었던 신화. 세월이 흐를수록 쌓이는 이질감 속에 멀어지는 남북관계를 보며 경제적·사회적 통합을 위해 뚜벅뚜벅 전진하는 독일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안착히 / 한국 글로벌협력팀장글로벌 아이 통일 동독과 서독 동독지역 젊은이들 동서독 국민

2023-10-03

[글로벌 아이] 한 재일동포 작가가 책을 쓴 이유

지난 19일 도쿄(東京)도 마치다(町田)시,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주스 한 잔을 쭉 들이키더니 일본어로 빠르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재일동포 작가 박경남씨다. 그를 만나게 된 건 100년 전 일어났던 간토(關東)대지진 때문이었다. 1992년 그가 내놓은 ‘두둥실 달이 떠오르면’엔 당시 조선인 300여 명을 구한 쓰루미(鶴見) 경찰서장 오카와 쓰네키치(大川常吉·1877~1940)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괴담에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무참히 살해당한 비극. 그 속에 존재했던 오카와 서장의 이야기를 그는 어떤 연유로 책에 담았을까.   “저는 돗토리(鳥取)현에서 태어났어요. 학창 시절, 할아버지가 대지진 당시 도쿄에 갔다가 살해당할뻔한 이야기를 들은 뒤론 마음속에 공포가 움텄어요. ‘만약 이런 대재난이 또 일어나면 내 친구들, 이웃들은 나를 구해줄까’ 그런 생각이요. 일본 속 자이니치의 이야기, 조선반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40대가 되고서야 글 쓰는 일을 시작했어요. 우연히 오카와 서장 이야기를 들었고, 희망을 품게 됐어요.” 어렵사리 만난 오카와 서장의 아들은 당시 자료들을 그에게 보여줬고, 서장의 이야기는 그렇게 책에 담겼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책을 본 한국의 한 대학병원에서 오카와 서장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연락을 해왔다. 서장의 아들은 고령이라 동행하지 못했고 대신 손자 오카와 유타카(大川 豊)가 그와 1995년의 어느 날 한국을 찾았다.   “강연 뒤 손자분 인사 차례가 됐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조부가 그렇게 칭찬받을만한 일을 한 걸까 생각했습니다. 조부가 한 일은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평범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왜 조부의 이야기가 미담이 되고, 책에 실리게 된 걸까요. 당시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너무 심한 짓을 했기 때문에 당연한 일조차도 칭찬받게 된 겁니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 한마디밖에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말을 듣고 생각했어요. 오카와 서장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오히려 조선인 학살 사실을 제대로 전할 수 있다고요.” 그는 이 이야기를 또다시 책에 담아 알렸다.   도쿄에서 간토대지진 100주년 행사가 끝난 지 벌써 한 달이 되어간다. 지난 100년이 그러했듯, 불과 한 달 만에 무참히 스러져간 조선인들의 이야기가 잊히는 건 아닌가 조바심마저 난다. 한·일 관계가 훈풍을 탔다는데 일본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우리 정부도 뒷짐을 지고 있다. 박 작가의 말이다. “적어도 무엇이 중요한지, 사실을 전하는 것부터가 중요하지 않나요?” 김현예 / 한국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글로벌 아이 재일동포 경찰서장 오카와 오카와 서장 이야기 조선반도

2023-09-26

[글로벌 아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지난 주말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었다. 외딴 섬에 초대받은 열 명의 손님이 하나씩 사라지는 미스터리 작품이다. 소설 전반부에 각자의 비밀을 축음기의 레코드가 공개한 뒤 “법정에 선 피고 여러분 할 말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후 동요의 가사 순서대로 사건이 벌어진다. “열 꼬마 병정이 밥을 먹으러 나갔네. 하나가 사레들렸네. 그리고 아홉이 남았네….” 사건의 전모는 손님으로 분장했던 범인이 남긴 편지로 밝혀진다.   지난 8일 람 이매뉴얼 주일본 미국 대사가 SNS에 크리스티의 소설을 언급했다. 중국의 친강(秦剛) 외교부장, 리위차오(李玉超) 로켓군 사령관에 이어 리상푸(李尙福) 국방부장까지 사라졌다면서다. 일주일이 흘렀다. 리 부장의 ‘실종’은 세계 유력지 1면에 실리는 빅뉴스가 됐다. 도대체 중국 지도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전조는 지난 7월 하순에 나타났다. 20~21일 베이징에서 ‘전군 당 건설 회의’가 5년 만에 소집됐다. 리 부장과 장유샤(張又俠) 군사위 제1부주석이 이례적으로 불참했다. 25일 친 부장의 면직이 확정됐다. 26일 중앙군사위가 군 납품 관련 비리를 신고하도록 지시했다. 파벌결성, 사적 유착, 기밀누설까지 고발 대상에 포함했다. 단순 부패적발이 아니라는 의미다. 시기도 2017년 10월 이후로 특정했다. 리 부장이 장유샤 후임으로 장비발전부장에 취임한 2017년 9월 직후다. 과녁을 조준했던 셈이다. 31일 리 로켓군 사령관이 끝내 교체됐다.    친강이 마지막 모습을 드러냈던 6월 25일도 의미심장하다. 러시아 용병조직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반란을 일으킨 바로 다음 날이었다. 두 달 뒤인 8월 24일 프리고진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중국인은 1971년 9월 린뱌오(林彪) 추락사를 떠올렸다. 1969년 4월 9차 당 대회에서 통과한 당장(黨章·당 헌법)에 “린뱌오 동지는 마오쩌둥 동지의 친밀한 전우이자 후계자”를 명기한 지 2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오 시대에는 이인자조차 안전할 수 없었다.   핵미사일을 다루는 로켓군의 지휘부 쇄신에 이어 고위 간부 자제인 홍이대(紅二代) 배경의 리 부장까지 사라졌다. 중국군이 시 주석의 군대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다. 대만을 겨냥했다는 ‘분투목표’ 달성 시한인 홍군 창설 100주년까지 4년이 채 남지 않았다.   소설 후반 배라 클레이슨은 벽난로 위 마지막 병정 인형을 손에 쥔 채 되뇐다. “그가 결혼을 하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신경진 / 베이징총국장글로벌 아이 로켓군 사령관 린뱌오 동지 소설 전반부

2023-09-18

[글로벌 아이] 폴 매카트니가 찾는 62년 전 기타

이 기타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호프너 500/1(Hofner 500/1)’이라는 바이올린 베이스 기타입니다. 독일 악기사 호프너가 1950년대에 출시한 모델인데, 주인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베이스 기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기타의 주인은 다름 아닌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 비틀스 초기 활동 당시인 1961년 독일 함부르크시 악기상에서 그가 단돈 30파운드(약 5만원)에 구매한 첫 베이스 기타랍니다. 이 모델 특유의 가벼운 무게와 바이올린을 닮은 대칭적인 구조가 왼손잡이인 매카트니가 연주하기에 딱 맞았던 것이죠. 100파운드짜리 펜더(Fender) 모델에 눈이 가기도 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기타는 ‘Love Me Do’ ‘Twist and Shout’ ‘She Loves You’ 등 당대 히트곡들 녹음에 연주됐으며, 비틀스 음악의 근간이 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악기로 칭송받았습니다. 열광적인 여성팬들이 실신해 나가는 방송과 공연현장에도 늘 매카트니와 한몸처럼 함께했었죠.   문제는 1969년 이후 이 악기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 반세기 전 런던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도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기타에 대한 관심이 요즘 다시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 악기를 찾아보자는 전 세계적인 캠페인이 시작된 것입니다. 매카트니는 만약 부서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초지종이라도 알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입니다. 81세 노장의 첫사랑에 대한 애착이라고나 할까요.   호프너사의 홈페이지에는 이 기타를 찾는다는 공지가 올라와 있습니다. 해당 기타의 정확한 스펙(사양)과 더불어 제보자에 대한 비밀보장 및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고 법적 조치 역시 않겠다는 구구절절한 내용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제보가 속속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다시 나타난다면 그 가치가 우리 돈으로 무려 160억원까지 솟구칠 수도 있다는 호사가들의 예측을 고려한다면 그 기타를 되찾는 것이 복잡한 협상 과정만큼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카트니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 기타에 대한 자신의 상상적 바람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독일 바바리아 산속 성에 초대받아 만찬 후에 호스트가 잠깐 따라오라고 해서 들어간 계단 위 작은 방 벽난로 위에 제 호프너 기타가 걸려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폴! 부디 그런 날이 와서 당신이 그 베이스 기타로 연주하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길 바랍니다. 안착히 / 한국 중앙일보 글로벌협력팀장글로벌 아이 매카트니 바이올린 베이스 비틀스 초기 비틀스 음악

2023-09-08

[글로벌 아이] ‘협치 리더십’ 못 보인 디샌티스

‘10월의 이변(October Surprise)’.   4년 주기로 11월에 치르는 미국 대선에서 선거전 막판 돌발 변수가 승패를 가를 때 쓰는 말이다.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과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이 겨룬 1972년 대선 당시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이 ‘베트남전쟁 종전설’을 주장해 닉슨 압승에 기여한 것을 계기로 생겨났다.   최근 사례로는 2012년 대선 직전이었던 10월에 발생한 허리케인 샌디가 꼽힌다. 샌디가 미 동북부 일대를 할퀴어 1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낳았을 때 민주당 대선후보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과 공화당 대선후보 밋 롬니가 보인 대처 방식은 사뭇 달랐다.   오바마는 위스콘신·오하이오 등 핵심 경합지 유세를 포기하고 피해가 집중된 뉴저지를 찾았다. 밋 롬니의 거센 추격에 지지율 역전 위기에 몰렸을 때였다. 그러나 피해 주민을 위로하고 “여러분이 일어설 때까지 잊지 않고 돕겠다”며 복구를 독려하는 모습은 큰 울림을 줬다. 대형 재난재해 앞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국가총사령관 이미지가 부각됐다. 반면 밋 롬니는 최대 승부처인 오하이오주를 방문하는 승부수를 택했지만 반은 유세, 반은 수재민 돕기 캠페인을 벌이는 ‘어정쩡 이벤트’로 유권자 주목을 끄는 데 실패했다.   그해 11월 6일 투표 결과는? 다 아는 대로 오바마의 낙승이었다. 모든 것을 허리케인 영향으로 돌리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선거 직전 “오바마가 허리케인에 잘 대처했다”는 평가가 약 80%에 달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유권자들이 국가적 위기 대처 능력을 지도자 선택의 중요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11년 전의 허리케인 샌디를 소환한 것은 지난 2일 허리케인 이달리아 피해를 본 플로리다주를 조 바이든 대통령이 방문했지만 공화당 대선주자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와의 만남이 불발됐다는 소식 때문이다. 대통령이 재난 지역을 찾으면 당이 달라도 주지사가 현장에 나와 힘을 합치는 모습을 보이는 게 관례다. 디샌티스 측은 ‘구호작업 지장’을 이유로 들었지만, 공화당 경선을 의식해 일부러 피했다는 분석이 많다. 디샌티스는 지난해 허리케인 이언으로 바이든이 플로리다를 방문했을 때는 그를 맞았다.   디샌티스로선 바이든을 대면하지 않는 게 공화당원을 대상으로 치르는 경선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하지만 대선은 길고도 긴 싸움이다. 대형 재난 앞에서 당장의 득표 전략 때문에 ‘협치의 리더십’을 포기한 그의 선택은 어떤 결말을 맞을까. 김형구 / 한국 중앙일보 워싱턴총국장글로벌 아이 리더십 공화당 대선후보 허리케인 샌디 민주당 대선후보

2023-09-05

[글로벌 아이] 블랙핑크와 전체주의

블랙핑크가 워싱턴에 오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에 맞춰 걸그룹 블랙핑크의 워싱턴 공연이 있을 거란 소문이 돌았지만, 얼마 후 바로 ‘없던 일’이 됐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안보실장이 대통령에게 보고를 누락해 그렇게 됐는지는 본인들만 알 이야기다.   그러나 저간의 사정을 잘 아는 워싱턴 인사들은 백악관부터 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미 짜인 투어 일정을 바꾸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특히 비용 부담이 문제였다. 한국 대기업을 포함해 민간 후원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법적 논란이 불가피했다. 사실상 백악관에 대한 뇌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 장소로 거론된 케네디 센터도 마찬가지였다. 수만 명이 모일 블랙핑크 팬을 수용할 공간도 없었지만, 국가적 대형 행사를 아무 절차없이 선정해 치렀다가 특혜 논란에 휩싸일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연방정부의 이해 충돌에 민감했다. 당장 이게 법적 문제까지 되진 않더라도, 다음 선거 때 공화당 측으로부터 공격의 빌미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얼마 전 한국에선 세계 잼버리 대회의 거듭된 파행에 대기업과 민간 대학이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수십만 명분 음료를 지원하고 현장 환경미화엔 신입사원들까지 동원됐다. 모두 ‘국가 이미지 실추’라는 풍전등화 위기 앞에 자발적으로 나선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이들 연수원·기숙사에 잼버리 참여자를 수용하라고 통보를 했다. 식사나 시설 이용에 대한 아무 지침이 없었고 당국의 비용지원도 없다고 했다.   모두가 합심해 훈훈한 미담으로 끝나는 모양새지만, 정부가 민간의 역량을 제 주머니서 꺼내 쓰듯 하는 것은 전체주의 국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공동체·국가를 개인보다 위에 두고 개인을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게 전체주의다.   정부가 보낸 공문 앞에 기업·대학들은 ‘안 하면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한 번쯤 걱정했을 것이다. 이번에 참여한 곳들은 뭔가 보험에 들어 놓은 기분일 수도 있다. 최소한 백악관이 블랙핑크 초청을 접으며 했던 ‘이해충돌’에 대한 고민이 한국 정부에선 전혀 없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고 말했다. ‘공산’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드리워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필규 / 한국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글로벌 아이 블랙핑크 전체주의 걸그룹 블랙핑크 워싱턴 공연 한국 대기업

2023-08-25

[글로벌 아이] 100세 재일 광복군과 오사카 요양시설 ‘산보람’

#노병의 손은 따뜻했다. 한국에서 한번 찾아뵙겠단 말에 주름이 활짝 펴졌다. 열여섯살 어린 나이에 광복군에 합류했던 오성규 애국지사는 평생 일본에 머물다 백세가 되어서야 한국행을 택했다.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다”는 아버지의 바람.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지난 11일 도쿄 네리마구 한 임대주택. 오 지사의 아들은 푹 고개를 숙인 채 아버지를 한국으로 모시러 온 보훈부 장관의 대화를 들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그가 알아듣진 못했겠지만, 그는 무릎을 꿇은채 30여분을 꼼짝하지 않았다.  이젠 한국에 가서야 만날 수 있는 아버지. 자식으로, 애달픈 일일 수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가 원하는 일”이라며 애써 복잡한 감정을 감췄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니까요? 세상에,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선 거예요!” 수화기 너머로 흥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재일동포 어르신을 위한 요양시설 ‘산보람’ 고경일 대표 얘기다. 휠체어가 없으면 거동이 어려운 재일동포 1세 어르신이 장구 반주에 나오는 우리 민요를 듣자 그만, 벌떡 일어났단 얘기다. 그는 “이게 민족의 피인가란 생각을 했다”고 했다.   고 대표가 소위 ‘자이니치’로 불리는 동포 어르신을 위해 요양시설을 만든 건 1990년대의 일. 일본 정부가 우리로 치면 요양보험제도를 도입했지만, 정작 가난한 자이니치 어르신들이 갈 곳은 없었다. 일제강점기 때 여러 사연을 안고 일본으로 넘어와, 차별과 가난을 딛고 살다 고독사한 1세 이야기가 그를 움직였다. 마지막 순간만큼 살아온 보람이 있도록 모시고 싶은 마음에 ‘산보람’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 머무는 자이니치 어르신들은 45명. 이 중 절반이 자이니치 1세대로 초고령이다.  아리랑을 부르고, 김치를 담그는 이곳 운영은 쉽지 않은 상태다. 코로나19 여파에다 이용자들의 형편이 좋지 않아서다.   일본의 빠른 고령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일본 사회 속 비주류로, 일제강점기 때 끌려오듯 넘어와 한국어와 김치로 마지막을 맞고 싶어하는 자이니치 고령자들의 이야기는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주일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일본에 있는 재외국민은 약 48만 명. 이 중 100세 이상의 초고령자는 올해 기준 42명이다. 이들이 어떤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할 것인지, 또 이들의 바람은 무엇인지 이젠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김현예 / 한국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글로벌 아이 요양시설 광복군 오사카 요양시설 재일동포 어르신 재일 광복군

2023-08-22

[글로벌 아이] “내 아파트 지킨다” 94일째 농성하는 그들

비구이위안(碧桂園). 베이징 현지 특파원에게도 낯선 단어가 최근 뉴스에 등장했다. 한자로 읽으면 벽계원, 푸른 계수나무 정원이란 뜻이다. 중국 5위 부동산 개발 업체명이다. 평화로운 이름과 달리 현실은 정반대다. 최근 비구이위안이 회사채 만기 이자 296억원을 갚지 못한 사실이 공개되며 부도설이 나돌고 있다. 자산 매각으로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만 이자를 못 갚을 정도라면 자금난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당장 상하이 증시에서 회사채 11종의 거래가 중지됐다. 여기에 돈을 빌려준 부동산 신탁회사들의 연쇄 도산까지 우려되는 상황. 이러다 중국발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터지는 것 아니냐는 암울한 전망이 쏟아진다.   지난 15일 베이징 퉁저우구에 비구이위안이 건설 중인 아파트를 찾아갔다. 멀리서도 ‘저 아파트구나’ 싶었다. 타워크레인이 전부 멈춰 있었다.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공사장 출입문은 굳게 닫혔다. 취재진을 보고 달려 나온 경비원들이 어서 나가라고 몰아쳤다. 주위를 둘러보다 뜻밖의 현장을 목격했다. ‘권리를 지키자-94일째’ 승합차 옆에 붉은 현수막이 나부꼈다. 그 뒤로 대형 천막에 텐트까지. 공사 중단에 항의하는 비구이위안 분양자들의 장기 농성 현장이었다. 중국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을 뿐 비구이위안의 자금난은 이미 중국인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고 있었다. 이달 초 폭우에도 자리를 지켰다고 했다.   한국 기자임을 밝히고 취재가 가능한지 물었다. 이들은 한국에서도 비구이위안을 아느냐며 관심을 가져주는 데 고마워했고 자발적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장기 농성 현장도, 언론에 적극적으로 말을 하겠다는 중국인을 만난 것도 특파원 생활 중 거의 처음이었다. 그들은 “회사 측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며 “공기지연, 재산 가치 하락에 대한 대책을 물어도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지역 정부 관계자와 공안이 찾아와 회사 측이 문제없이 처리하기로 했다,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도 된다고 했지만 정작 회사 측이 분명한 답을 내놓지 않아 이렇게 돌아갈 수 없다.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계속 시위를 할 것”이라고도 했다.   현장의 민심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한 분양자는 “비구이위안이 (중국) 언론에 하는 얘기는 좋은 말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도 믿을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있던 이는 같은 피해자가 “최소 2만 명은 될 것”이라고 거들었다. 비구이위안의 올 상반기 순손실 예상액은 무려 550억 위안(약 10조원)이다. 이런 현장은 얼마나 더 많을까. 부동산 경기 침체가 중국을 잠식하고 있다. 박성훈 / 한국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글로벌 아이 아파트 농성 비구이위안 분양자들 최근 비구이위안 장기 농성

2023-08-20

[글로벌 아이] 호주의 절박한 이민정책

“불과 3㎞ 남짓 떨어진 학교에 아이를 차로 등교시키는 데 45분이 걸려요. 1시간 반이나 허비한 적도 있어요!” 신흥 개발국의 대도시 등에서나 벌어질 법한 이 교통지옥이 일어난 곳은 의외로 호주 멜버른이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상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곳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호주 당국은 급격한 이민자 유입을 그 원인으로 꼽고 있다.   올해 호주통계청 집계에 의하면 멜버른은 시드니를 제치고 호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에 올랐다. 올 7월 기준 520만 인구로, 그 숫자가 가파르게 늘고 있다. 인도 이민자가 대거 정착한 인근 서쪽 지역까지 멜버른시에 속하게 됐다. 20년 전 인구가 350만 명이 채 안됐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확장이다.   멜버른뿐 아니다. 호주 전체를 놓고 봐도 팬데믹이 잠잠해지면서 인구증가율이 지난해 1.9%를 기록했는데, 이는 2008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늘어난 인구를 수용할 주택을 짓고 있지만 아직 한계가 있다. 대중교통 등 각종 편의를 위한 인프라, 특히 도로망 확충이 함께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이민자뿐 아니라 기존 주민의 삶의 질이 떨어지고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한마디로 시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다. 그런데도 호주 정부는 이민자 정책을 계속 완화하며 국경을 열고 있다. 왜 그럴까. 널리 알려진 대로 호주는 이민자의 나라다. 2차 대전 이후 호주 정부는 수십년간 ‘인구증가냐 소멸이냐’(populate or perish) 정책을 펼쳐 왔다. 1945년에서 1965년 사이 이민자 200만 명이 호주로 이주해 정착했다. 당시 목표가 단순 인구 유입이었다면 요즘엔 사정이 다르다. 목적이 보다 분명하고 뚜렷하다. 인구 고령화와 지구온난화 등의 선진 각국이 직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다. 좀처럼 해법이 보이지 않는 난제를 해결하려면 특정전문인력을 유치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요즘 호주 정부가 내건 구호 ‘skill up or sink’(상승할 건가, 침몰할 건가)에서 그 절박함이 엿보인다. 아이를 등교시키는 부모들의 스트레스가 커질지언정 외국의 인재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한국은 어떤가. 인구소멸의 길에 들어섰다는 각종 예측과 경고에도 실효성 있는 출산율 증대 정책은 커녕 적극적인 이민 정책에 대한 논의도 아직 빈약한 상태다. 인구 문제는 최근 국민이 답답함과 수치심을 느끼며 바라본 잼버리 사태처럼 하루 아침에 뚝딱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광복의 기쁨을 돌아볼 오늘 아침, 우리의 미래가 공연히 더 어둡게 다가온다. 안착히 / 한국 글로벌협력팀장글로벌 아이 이민정책 호주 호주 정부 올해 호주통계청 호주 당국

202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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